회계기준은 기업의 ‘채점 기준’이다. 회계기준이 바뀔 때마다 기업들이 촉각을 곤두세운다. 현재 상장사가 쓰고 있는 회계 작성 기준은 국제회계기준(IFRS)이다. 한국인 최초로 이 기준을 만드는 ‘출제위원’이 된 사람이 있다. 바로 서정우 전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 위원이다.
서 전 위원은 지난 6월 30일 IASB 위원 임기를 마치고 최근 귀국했다. 원래 임기 5년에 연임 3년, 도합 8년 만이다. 지난 7월 초 런던에서 귀국한 그는 2주 간의 격리를 마치고 국민대 교수로 돌아왔다.
내년으로 예정돼있던 새 회계기준(IFRS 17) 도입은 IASB에 의해 2022년으로 연기됐다가 다시 2023년으로 미뤄졌다. 새 기준은 보험사가 고객에게 지급해야 하는 보험금인 보험부채를 원가가 아니라 시가로 평가하도록 한다. 이에 보험사는 수천억원대의 자본확충이 필요해졌다. 보험사는 과거에 확정형 고금리 상품을 많이 팔았는데, 현재 저금리하에서 가입자에게 돌려줘야 하는 이자를 모두 부채로 기록해야 한다.
서 교수는 "보험사가 큰 자본을 확충해야 하는 상황에서 각 정부는 IFRS를 있는 그대로 적용하기보다 산업의 현실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절충안을 내놓을 것"이라며 "투자자들은 재무제표나 사업보고서의 주석을 열심히 봐야할 것"이라고 했다.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는 IFRS를 제정하고 배포하는 곳으로 전세계 주요국 출신 14명으로 구성된다. 위원수는 유럽과 미주, 아세아·오세아니아 등 대륙별로 안배한다. 서울대와 미국 일리노이대를 졸업한 서 교수는 위원 선출 전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를 거쳐, 2005~2008년 회계기준원 부원장, 2008~2011년 회계기준원장을 지내며 국내 IFRS 도입에 큰 기여를 했다. 다음은 서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위원직을 마무리한 소회는.
"런던생활 8년은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양적완화가 시작되면서 돈이 풀렸고, 저금리의 시대가 왔다. 중간엔 브렉시트(Brexit)도 있었다. 낙관적인 기대를 할 때가 되니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연기됐다. 유럽연합(EU)의 재무창고가 위치한 곳이자 국제도시인 런던에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최전선에서 볼 수 있었다. 한국이 배워야 할 점이 참 많다."
-국제무대에서 봤을 때 한국의 회계 수준은 어느 정도로 평가할 수 있나.
"한국은 이미 한국만 모르는 선진국이다. 물론 개선해야할 점이 있지만, 한국의 회계 수준은 이미 글로벌 탑10에 진입했다. 회계 자체는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지만 정보의 비대칭을 해소해 거래의 효율성을 높이고 거래비용을 줄일 수 있다. 정보가 투명하면 거래 횟수나 거래의 품질이 좋아진다. 좋은 회계 기준은 경제가 성장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IFRS가 국내에 전면 도입된지 10년 가까이 됐는데, 어떻게 평가하는지.
"긍정적인 부분이 컸을 것이라 본다. 국제적으로 봤을 때 더 많은 국가와 기업들이 IFRS를 선택하고 있다. IFRS를 채택한 국가 수가 공식적으로 120여개가 됐고, 독자 체제를 쓰고 있던 미국이 자국 내에서 IFRS를 쓰는 것도 동등하게 인정하겠다고 했다.
IFRS는 한국 기업과 한국 경제에 중요한 인프라다. IFRS를 전면 채택한 4개국 중 하나인 한국은 IFRS 도입을 통해 국제무대의 인정을 받게 된 것 같다. 예전엔 외국 투자를 받기 위해 회계 장부를 한국용, 대외용 두 개씩 만들어야 했다. 이젠 하나만 만들어도 된다. 국민은행이나 우리은행처럼 미국에 상장돼있거나 유럽에 상장된 삼성전자 같은 기업들에 보다 효율적으로 바뀐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IFRS 도입은 기업뿐아니라 투자자에게도 도움이 된다. 회계가 투명해지면서 투자자는 기업의 진정한 가치를 볼 수 있다. 기업들은 퀄리티 있는 장기 자금 유치에 유리해지고, 이를 통해 경제도 좋아질 수 밖에 없다.
IFRS가 도입되기 전 2010년 12월 기준 금융감독원에 등록된 외국인 투자자 수가 3만1000명이었다. 작년말 기준으로는 4만8000명으로 1만7000명 늘었다. 이들이 투자하는 금액도 375조원에서 561조원으로, 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32.9%에서 38.1% 정도로 확대됐다. 회계기준 때문만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을 거라 볼 수 있다.
런던에서도 한국이 회계장부 처리를 형식적으로 했다거나 분식이 있다거나 하는 부분이 많이 사라졌다고 믿고 있다. 예전에 국가적으로 우려했던 '코리아 디스카운트'도 많이 사라지고 있다고 본다."
-IFRS가 기업에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무엇인가.
"회계를 기계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진짜 영업이익은 얼마인지 기업 경영진이 고민해야 한다. '진짜' 영업력과 영업성과가 얼마인지 국제 기준으로 정확히 표시하라는 거다.
가령 A기업과 B기업의 가치가 3조원으로 똑같다고 치자. A기업은 판 매출만 가지고 자산을 만들었는데, B기업은 나중에 돌려줘야 하는 자산을 자신의 자산으로 편입시켜 이를 내놓는다고 해보자. 이럴 때 실제 가치는 어떤 기업이 더 큰 걸까.
국제회계기준은 부채비율을 정확히 하고, 수입이 얼마고, 미래 현금흐름을 정확히 예측해 A, B기업의 가치가 그대로 드러나는 걸 목적으로 한다. B기업이 손해를 보니 B기업의 목소리가 커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영업을 잘하는 A기업과 A기업에 투자한 사람들이 득을 보는 것이다. 정확한 자원 배분은 좋은 기업에 득이 된다."
-새로운 IFRS 개정안이 도입될 때마다 기업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칙은 예외없이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기업들의 어려움도 이해가 간다. 그 어려움을 무시할 수는 없다. 특히 기업들의 출발선(initial endowment)이 다른 상태에서 같은 채점 기준을 들이대는 건 공정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큰 원칙은 지키되 적용하는 과정에선 ‘절충안(compromise)’이 존재할 수 있다.
회계기준을 도입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정부에서 고민해야할 부분이다. 도입은 했지만 중요한 것은 감독기준을 어떻게 하느냐인데. 요구자본이나 자본요건 규제를 어떻게 정할지, 필요한 수치를 정할 때 어떤 계산방법을 쓸지도 달라질 수 있다. 금융위에선 이런 수단들을 조합해 기업들을 살리면서, 기업의 가치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최적화된 솔루션을 찾을 것이라 본다.
다만, 이렇게 되면 정부와 기업은 좋은데 투자자가 손해를 볼 수 있다. IFRS는 이를 막기 위해 주석 공시를 방대하게 해놨다. 투자자들은 주석에 어떤 계산을 통해 특정한 숫자가 나왔는지 역산(逆算)할 수 있도록 해놨다."
-코로나 때문에 기존 IFRS 도입 계획이 연기될 가능성은 없을까.
"현재 위원회의 입장은 '어렵지만 가야한다'는 것이다. IFRS17의 경우 미국도 일부 내용을 차용해 1년 빨리 적용하기로 했다. 유럽의 경우 유럽연합 26개국 합의가 있어야 내용이 바뀌는데, 이미 정한 걸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IFRS17 도입 관련해 앞으로의 전망은.
"IFRS17은 보험 부채를 시가 평가하는 내용으로 보험사들이 가장 관심이 많을 것이다. 2023년에 도입되고, 3년 뒤에 사후 리뷰(Post Implementation Review)를 한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의견을 들어서 3년 후에 개정 작업을 하는 것이다. 업계에선 아직도 여기에 관심이 많다. 개인적으로 제도가 제대로 정착되기 위해선 최소 5년은 걸릴 거라 본다."
August 19, 2020 at 08: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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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우 前 IASB 위원 "새 회계기준, 어려움 있겠지만 좋은 기업엔 득" -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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